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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별아 Essay <1편>

여행,감각의 결을만지는 일









흐르는 시간의 강 속에서

기묘한 일이다. 애초에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태어난 ‘시간’ 속에서 그것이 ‘흐른다’고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올해로 두 자릿수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다. 새해 첫날 병장으로 진급한 아들은 군에서 안부 전화를 걸어와서는 엄마의 낯선 나이를 연신 ‘징그럽다!’고 외친다. 어쩌랴. 나는 더 이상 네가 보고파 하는 먼 곳을 보여주기 위해 어깨 위로 너를 번쩍 들어 올려줄 젊은 엄마가 아니고, 너는 언제까지고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을 노래하면 섬집 아기의 외로움이 아파 엎드려 울던 순량한 어린아이가 아닌 것을.시간이 흐르는지, 다만 우리가 세상을 스쳐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시간도 우리도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는 것.1616년 광해군 8년 증광회시 책문(策問), 말하자면 임금이 문과 대과의 마지막 관문에 들어선 33인의 수험생에게 제시한 논술 주제는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였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책문은 임금이 시대의 정치 현안을 젊은 인재들에게 물어 비전(vision)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 급제자 이명한은 ‘역사의 기록도 믿을 수 없고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지만 선비로서 덕을 닦고 학문을 통달하는 데 전심전력해야 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나는 그 빤한 모범답안보다 생뚱맞은 책문을 내놓은 광해군의 심정이 더 궁금하다. 1616년이라면 1608년부터 15년간 재위한 광해군이 임금으로 살았던 시간의 한가운데, 막 40대에 들어선 그가 느낀 시간의 흐름은 과연 어떤 빛깔이었을까?어쩌면 시간은 의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은 기억으로 실재성을 얻는다. 우리가 간직한 기억 속에서 시간은 커지거나 쪼그라들고, 멈춰버린 채 영영 지워지지 않기도 한다. 어제처럼 생생한 시간이 있는가 하면 고의적이거나 방어적으로 망각되어 지워진 시간이 있다.







삶이 지루해질수록 빨라지는 세월

시간과 기억이 부리는 또 다른 요사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20대에는 시속 20㎞, 50대에는 시속 50㎞, 70대에는 시속 70㎞로 세월이 지나간다는 말은 웃을 수 없는 우스갯소리다. 이 속설에 대해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밝힌 진실은 흥미로우면서도 약간은 맥 빠진다. 나이와 시간의 속도가 정비례한다는 감각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단순한 ‘느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직 시간 감각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기억만이 그 속도의 요사를 설명한다.2009년 미국 오벌린대 연구진은 이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성인이 될수록 진기한 경험이 드물기 때문에 시간 측정의 기준이 되는 ‘사건’ 자체가 별로 없다고 느껴 시간도 빨리 흐른다고 느끼게 된다. 두 번째는 하루하루를 바쁘고 정신이 없이 보낼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낀다. 세 번째 가설은 흐릿한 기억을 실제로 일어났던 것보다 오래전 일이라고 생각하는 뇌의 활동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삶이 지루해지면 시간은 휙휙 쌩쌩 정신없이 흐른다. 오직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선잠의 미몽처럼 흐릿하고 몽롱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여행이란 일상의 감각을 흔드는 사건

그래서 여행은 인생을 길고 알뜰하게 느끼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가 된다. 경험과 사건을 만들고 휴식과 오락 속에서 싱싱한 기억을 빚어낸다. 선반 위 트렁크를 끌어내려 먼지를 털고 행장을 꾸릴 때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떠나 닿을 그곳의 햇빛과 바람이 살갗에 내려앉고 머릿속에서 휘몰아친다. 공항만큼 설렘과 긴장으로 팽팽한 공간이 또 있을까? 끊임없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사람들 속에서 무수한 이별과 만남을 맛본다. 누추한 일상과 너절한 고민은 트렁크 대신 벽장 속에 넣어두고 잠시 잊는다. 잊어야 한다.여행지의 시간은 두고 온 일상과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새로운 풍경과 낯선 언어,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은 불안하고 두렵지만 느즈러졌던 마음이 바짝 죄며 기억은 촘촘해진다. 구태의연한 생각과 무뎌진 감각이 흔들리고 순간순간 새로운 향기와 맛과 기분에 들뜬다. 그리하여 모든 것에 익숙한 채로 탕진하던 시간을 정성스럽고 빈틈없이 살게 되는 것이다.장 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가장 잘 산 사람은 가장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가장 잘 느낀 사람”이라고 했다. 나이를 먹으며 호흡과 혈압과 맥박과 신진대사와 호르몬 방출 등 생체 리듬을 관장하는 기능이 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테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삶의 결을 만지노라면 기억의 청춘, 시간의 부자가 된다. 부싯돌의 불처럼 깜빡 짧은 인생을 조금은 더 뜨겁게 살 수 있다.떠날지어다. 살아있는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놓치지 않기 위해, 더 깊이 오오래 머물기 위해.






소설가 김별아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93년 『실천문학』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미실』을 비롯하여 장편소설 『논개』, 『백범』, 『열애』, 『가미가제 독고다이』, 『채홍』, 『불의 꽃』,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탄실』 등과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삶은 홀수다』, 『스무 살 아들에게』,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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