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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별아 Essay <3편>

그 기억을 만지고 싶다







           

본능적인 사랑의 방식, 촉각

외로운 아이에게 간절했던 감각은 피부를 통해 전달되는 촉각이었다. 고작 한 달뿐인 출산 휴가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일터로 돌아간 엄마와 충분히 이루지 못한 애착이 갈급했던 걸까? 가정 경제의 당당한 한 축으로 자신의 삶을 일궈낸 엄마에 대한 감사와 존경과는 별개로, 잠자리 날개처럼 여리고 바스락거리는 신경을 가졌던 아이는 알게 모르게 애정 결핍을 앓았나 보다. 영혼이든 육신이든 타인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능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지근거리는 것으로 친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원하는 만큼 충족할 수 없었던 부드러움과 따뜻함에 대한 결핍이 그를 촉각에 민감하게 만들었을 테다. 눈을 감고 평화롭고 무구했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상상의 손끝으로 그때의 따뜻하고 다정한 감촉을 어루더듬는다. 부드럽고 가벼운 새털의 간질거림, 이슬을 머금은 꽃잎의 청량한 차가움, 막 돋아난 새순의 여림…, 그것들이 시간을 뛰어넘어 기분 좋고 행복한 촉감으로 되살아난다. 찰랑찰랑한 실크 블라우스, 일백 퍼센트 순면의 내의, 그리고 더운물에 씻겨 보송한 수건으로 잘 닦고 베이비파우더를 발라준 후 낮잠을 재울 때 품 안을 가득 채우던 아이의 말랑말랑한 고무공 같은 몸과 새근새근 뿜어져 나와 볼을 간질이던 낮은 숨결.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필링. 비틀스의 노래 가사 대로 사랑은 접촉이고 느낌이다. 말을 내뱉는 것은 입이고 듣는 것은 귀이지만 피부 또한 말하고 듣는다. 손을 잡고 뺨을 만지고 살갗을 쓰다듬어 체온을 나누는 일은 어떤 사랑의 방식보다 본능적이고 즉각적이며 직접적이다. 시간은 우리를 점점 더 거칠고 딱딱하고 무거운 세계로 몰아넣고, 그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갑옷을 두르고 무감각으로 버텨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쩌랴, 온몸으로 세계를 낱낱이 느끼던 천둥벌거숭이 시절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다.







새로운 세계에 손을 뻗는 용기

여행에서 촉각은 오감(五感) 중 가장 보수적으로 발현되기 십상이다. 피부를 통해 질감과 온각, 냉각, 통각을 느끼는 과정에서 낯선 촉각은 흔히 이물감으로 다가와 거부감이나 긴장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따금 텔레비전 쇼에서 검은 보자기를 씌운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참가자들이 손을 넣어 만져보고 알아맞히는 게임을 한다. 텔레비전 쇼에서 참가자들을 해칠 만큼 위험한 소품을 쓸 리가 없음을 참가자는 분명히 알고 있다. 아무리 모험적이고 특이하다 해도 해산물이나 생닭 같은 식재료나 살아있다면 토끼 같은 잔짐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은 보이지 않는 상자 속에 손을 넣을 때 공포를 느끼며 벌벌 떤다. 끔찍한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맛보고 냄새를 맡는 것보다 직접 손으로 만지는 일이 훨씬 더 큰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여행에서 손을 뻗어 무언가를 만지는 일은 호기심을 넘어선 용기를 요구한다. 문화재나 유적처럼 만지지 말아야 할 것들뿐만 아니라 꽃과 나무, 담벼락과 강물이나 바닷물까지도 낯선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두려움 속에 손가락을 오므려 쥐고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찌른 여행자는 그 세계의 알짬을 놓치고 겉핥기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촉각이야말로 오감 중에서도 대단히 직접적이고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이며 그래서 상당히 주관적이기에, 여행이 새롭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기꺼이 만져야 한다.





사랑으로 새겨질 여행이라는 낯선 촉감

다시금 러브 이즈 필링, 그것은 연애나 사랑과 같다. 감정의 장난질이자 서툰 열정의 발현이자 성장의 통과의례이자 맹렬한 소통의 욕구였던 연애의 기억 속에서 숱한 사건들을 제치고 가장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접촉의 느낌, 그 낯선 촉감이다. 처음 잡았던 손, 처음 스친 입술, 처음 다가온 체온…, 타자에 대한 이물감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때로 더욱 선명해진다. 그것이 바로 추억의 온도이며 감촉이기 때문이다.촉각을 일깨우는 여행은 천진하고도 용감한 사람들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아이들이나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여행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이미 아는 것에만 사로잡힌 겁쟁이들에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맨발로 몽돌 해변을 걷고, 길섶의 꽃잎을 만져보고, 진득한 갯벌을 발바닥에 느끼거나 건들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본다.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바위를 껴안아 보고, 일일이 어루만져 가시가 있는 음나무와 질감이 부드러운 향나무를 분별한다. 몸과 마음의 문턱을 뛰어넘으면 손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 졸작 《미실》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미실은 밤새 비 내린 초여름 아침의 정원에서 익어가는 앵두나무와 마주한다. 옷자락을 걷고 엄지와 검지를 내밀어 그중 가장 잘 익은 앵두 한 알을 딸 때, 그녀의 귓전에는 외할머니이자 스승인 옥진의 지혜로운 말이 쟁쟁하다. “세상의 모든 걸 맛보렴. 만져 보고, 맡아 보렴. 머뭇대지 말고, 아가, 깨물어 터뜨리길 두려워하지 말고.”   촉각은 세상과 조우하는 가장 은밀하고도 가장 선명한 감각의 비밀일지니. 






소설가 김별아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93년 실천문학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미실』을 비롯하여 장편소설 『논개』, 『백범』, 『열애』, 『가미가제 독고다이』, 『채홍』, 『불의 꽃』,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탄실』 등과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삶은 홀수다』, 『스무 살 아들에게』,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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